5. 인니 어디 있니?

인도네시아를 비웃던 한국, 선관위는 무엇을 배웠나

다음장 2026. 6. 4. 17:05

 

― 소쿠리 투표 논란 이후 4년, 또다시 반복된 선거 관리 부실을 보며

인도네시아에 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에도 인도네시아에서는 선거가 진행됐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방역수칙을 지키면서도 국민들의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한국인의 눈에는 다소 낯설고 투박해 보이는 장면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일부 한국 언론과 인터넷 공간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선거 현장을 보며 비웃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역시 동남아답다."

"저게 무슨 선거냐."

"선진국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반응들이었습니다.

 

물론 현장의 모습이 한국인의 기준에서는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군도 국가입니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교통 인프라도 지역마다 차이가 크고, 투표용지를 전달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국가적 프로젝트에

가깝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국민의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오히려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저는 더 황당한 장면을 보게 됐습니다.

 

2022년 제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과정에서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와 격리자의 투표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소쿠리와 종이상자, 비닐팩 등이 사용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국민적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사진을 보면서 저는 인도네시아 선거를 비웃던 사람들의 반응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비웃을 수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춘 나라입니다.

 

행정 시스템 역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국 어디든 하루면 물건이 배송되고,

스마트폰 하나로 대부분의 행정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선거 관리의 기본 원칙이 무너지는 장면이 연출됐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더욱 아쉬운 점은 그 사건이 일회성 논란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26년 6·3 지방선거에서는 서울 송파구와 일부 지역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장시간 대기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투표를 하기 위해 오랜 시간 줄을 서야 했고, 현장에서는 불만과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예상보다 높은 투표율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국민 입장에서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입니다.

 

투표율을 예측하고, 부족 상황에 대비하고, 예비 물량을 확보하고, 긴급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것 역시 선거관리위원회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식당에서 손님이 많아 재료가 떨어지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 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투표는 국민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국민이 정해진 시간에 투표소를 찾아갔는데 투표용지가 부족해 기다려야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행정 착오로

치부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는 실수 자체가 아니라 반복이라는 점입니다.

 

2022년 소쿠리 투표 논란 당시 선관위는 국민 앞에 사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이후에는 모든 매뉴얼과 시스템을

원점에서 재검토했어야 합니다.

 

투표용지 관리 체계는 충분했는지, 예비 물량 확보는 적절했는지, 현장 대응 매뉴얼은 현실적인지,

긴급 상황 발생 시 책임 체계는 명확한지 꼼꼼히 점검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또다시 선거 관리 부실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한 번은 실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유형의 문제가 반복된다면 국민은 시스템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헌법상 독립기관입니다.

정치권력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선거의 공정성을 지켜야 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러나 독립성은 책임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독립기관일수록 더욱 엄격한 감시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동안 선관위는 여러 논란이 발생할 때마다 스스로를 헌법기관이라고 설명해 왔습니다.

물론 그 지위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국민이 기대하는 것은 기관의 지위가 아닙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선거 관리입니다.

헌법기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신뢰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신뢰는 철저한 준비와 책임 있는 대응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선거 현장은 여전히 우리 눈에 불편하고 낯설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지리적 한계와 물리적 어려움 속에서 선거를 치르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다릅니다.

시스템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예산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기술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때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더욱 실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동남아 국가들을 쉽게 평가해 왔습니다.

그러나 2022년의 소쿠리 투표 논란과 2026년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돌아보면 이제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비웃을 자격이 있었을까요.

 

민주주의는 거창한 구호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유권자가 투표소에 갔을 때 투표용지가 준비되어 있는 것, 투표함이 안전하게 관리되는 것,

그리고 선거 결과를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것.

 

민주주의는 그런 기본에서 시작됩니다.

후진적인 것은 바구니나 상자가 아닙니다.

 

진짜 후진적인 것은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진정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는 헌법기관이 되기를 바란다면,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인도네시아를 비웃던 한국.

이제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